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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연

[미술평론가]

형태와 색,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나타남

허공에 박힌 듯 밤하늘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현미경에 한쪽 눈을 갖다 대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물의 아득한 표면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조금 닮았다. 둘다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감이 나와 풍경 혹은 사물 사이에 가로놓여 있지만, 동시에 그것(거리감) 때문에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매우 크다.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은, 알지 못함과 보고 있음의 간극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의 현전을 보고 있는 나를 그것[알지 못하는 것의 현전]과 떨어뜨려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불확실한 가능성이 나타나는 일면을 경험하는 것은 결국 그것의 존재를 사유하고 있는 내가 어떤 거리감에 의해 타자의 자리에서 자각되는 순간을 함의한다. 그 순간의 고요함과 경이로움이 알지 못하는 것의 나타남을 반기면서, 나를 초월한 현상의 경험을 강렬하게 인식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연의 작업은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번번이 낯선 대상을 눈앞에 갖다 놓는데 특히 매우 시각적인 요소가 극대화된 상황을 제시한다. 극대화된 시각적인 대상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수수께끼 같은 정체로 인해 알 수 없음이라는 지각의 불능을 동반한다.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는 나에 대한 자각은 김태연의 작업에서 동일하게 되풀이된다. 이번 전시 <살아있는 또는 죽어있는>은 모두 회화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그의 작업은 매체와 형식에 있어서 큰 제한이 없을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에서 회화만 보여주는 것에 대해 그는 한 가지 이유를 들어 먼저 설명했다. 그것은 일종의 "나타남"과 관련되어 있다. 세계 내의 낯선 대상들이 현전하게 되는 특수한 시각장과 그러한 현전의 순간들처럼, 김태연은 회화적인 조건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창발(創發):에 주목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어떠한 개별적인 형태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예측할 수 없었던 형태나 움직임이 창조적으로 발현되는 창발 현상에, 회화와 이미지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사유를 투과시켜 보는 것이다.

 

<나와 대면하는 나>(2018)을 보면, 추상적인 형태들이 유기적인 구조를 한껏 강조하면서 화면을 구성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대략 세 가지 색조와 타원형에서 조금씩 변형된 단위형태를 기반으로 하여 서로 긴밀하게 결합된 이 회화는, 개별젹인 색과 최소 단위의 형태를 능가하는 유기적인 구조와 그것의 자생적인 운동성을 보여준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이 회화의 이미지는, 알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의 추상적인 행위가 "유사형태"로 나아가는 사유의 창발을 돕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정황은 <좌표에서 움직이며 기원하다>(2018)에서도 계속된다. 상하좌우 대칭적인 구조를 지닌 화면의 구성은 단일 형태가 지닌 운동성을 내적으로 더욱 조직화하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전체 이미지가 함의하는 거리감을 신비하게 발산한다. 이러한 창발의 시각적인 효과는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인 회화의 과정을 통해 검토된다.

 

우선, 김태연은 주변의 사물을 반복적으로 접하고 사용하면서 얻게 된 형태에 대한 감각을 드로잉으로 풀어낸다. 사물의 형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이 드로잉의 과정에서, 김태연은 그것[사물의 형태]을 이미지로 심화시키려 하기 보다는 그것과의 상이함으로 나아가는 형태의 무한한 연장을 꾀한다. 형태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그의 드로잉은, 형태의 윤곽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외부의 무언가로 연결되고 흡수될 수 있는 자기 증식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일종의 자동기술적인 태도에 의존해, 그는 그 시작을 발견된 오브제처럼 사물의 형태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드로잉을 시도한다. 드로잉에 집중하여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중에, 의식과 무의식 혹은 선택과 즉흥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경험을 통해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형태가 포착되는 순간에 다다르면 드로잉을 완성한다. 참조한 사물의 형태를 재현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도에서 추상적인 선의 반복을 선택했던 드로잉의 결과물은, 형태에서 움직임으로의 전이를 시도한 것처럼 유기체의 자기 조직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드로잉의 결과물은 다시 캔버스로 옮겨져 회화적인 조건 안에서 추가적인 변형과 증식을 꾀하게 된다.

 

특히 <좌표에서 움직이며 기원하다>를 보면, 이미지의 복제와 대칭을 통해 강조된 단위 형태들의 시각적인 확장 가능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김태연은 이러한 조형적인 요소들을 회화의 범주에서 추상적으로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데, 동시에 그는 자신의 회화 안에서 모색되는 조형적 특성을 유기적인 생명체의 증식과 발화 현상에 견주어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나타남이라는 "현전"과 일치시켜 놓는다. 그것을 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는 "창발"이라는 개념으로 탐구하면서, 회화의 조형적 창발에 대한 가능성을 견인한다.요컨대, 김태연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의 형태를 통해 유기체적인 증식과 운동의 창발에 대해 상상하는 자동 기술적 드로잉을 거쳐서, 회화에 와서는 다시 완결된 형태로서의 드로잉이 회화적 조형 원리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로 창발되는 과정을 계속해서 순환시키고 있다. 이때, 알지 못하는 형태들을 바라보는 경험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작업의 과정이 관람의 경험에 중요한 태도를 요청하듯 미지의 형태와 대면하여 그것을 자각하고 사유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강조된다. 그것은 또한 추상에 대한 회화적 경험과 맞닿는다. <나와 대면하는 나>라고 이름붙인 작업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추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시각 경험의 복잡한 층위를 가늠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한편, <생물과 비생물과의 연결>(2018)은 말 그대로 생물과 비생물로서의 사물을 연결시켜 새롭게 생성된 이미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앞선 작업들의 과정에서 파생된 것일 수도 있는 이러한 시각은, 이질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의 결합을 통해 창발되는 "새로운 전체"에 대해 표상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교배와 번식 1-2>(2018)이나 <침공을 위한 여행>(2018)시리즈도 마찬가지로, 김태연은 둘의 이질적인 결합에 목적을 두었다기 보다는 그 결합의 결과에서 우연히 생성된 자기조직적 형태와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통합된 전체의 유기적인 속성을 재차 강조하면서, 이는 다시 개별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의 창발에 대해 구체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동안 김태연은 상이한 가치들의 결합을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범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러 왔기에, 그의 행보가 이질적인 것들의 경계를 탐색함으로써 각각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자리를 점유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의와 규범들 사이의 경계를 살피기보다는, 그것의 통합을 살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살아있는 또는 죽어있는>인 것은, 그러한 정황들 때문에, "-또는-"으로 연결된 개별적인 상황으로 다시 환원시킬 수 없는 유기적인 이미지의 창발을 표상하는 새로운 함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All works © TaeYeun Ki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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